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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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45)
2011년 03월 29일 22시 51분  조회:2647  추천:21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45)            

(1) “문화대혁명”이 통일전선에 가져다 준 엄중한 파괴
(2) 개인숭배와 “신”을 모다들어 만들었다    
(6) 흐루쇼브 쓰딸린의 유체를 태운일이 모택동의 심리에 준 영향 
   


    “문화대혁명”이 통일전선에 가져다 준 엄중한 파괴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은 확대회의를 열고 모택동이 제정한 중공중앙의 통지(즉 <<5. 16통지>>)를 통과했다. 
   
8월, 중공 8기11중전회에서 또 모택동의 의견에 따라서 제정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결정에 관하여>>를 통과함으로써 전국범위내에서 “문화대혁명”이 전면적으로 발동되였던 것이다.
련속10년간 계속된 동란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해왔던 통일전선은 박해를 받아 산산히 조각나 숨이 간들간들했다. 
      

1.통전부, 인민정협은 마비되거나 반마비상태에 처했다.
         
1966년 8월, 중공8기11중전회에서 진백달, 강청과 중앙“문혁”소조의 기타 성원들은 먼저 중앙통전부를 향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중앙통전부를 포위공격하여 부장 서빙(徐氷)을 잡아갓다. 그들은 새 중국이 성립된 이래 통전사업이 거둔 거대한 성적을 전면부정하면서 전국의 통전, 민족, 종교사업부문에서는 “투항주의”, “수정주의”로선을 집행했다고 모독했다. 그러면서 통전부를 “요물잡귀신비호소”라느니 “자본주의복벽부”라느니 했거니와 “자산계급사령부”와 련계시키면서 통일전선을 제멋대로 파괴하고 못쓰게 만들 구실을 달았다. 그리고는 또 광대한 통일전선간부들을 “자산계급대리인”이라느니 “자산계급효자현손”이라느니 “반혁명수정주의분자”라느니 하면서 무지비한 타격과 잔혹한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중앙통전부부장 서빙(徐氷)은 끌려다니며 투쟁을 많이 받았고 후에는 감옥에 갇히여 고생하다가 1972년에 억울하게 옥사하고말았다. 
   
각지의 통전간부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옥에 갇히고 어떤 사
람은 로개를 했으며 어떤 사람은 박해를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말았다.  
   
이와 함께 인민정협기구역시 “투항주의”, “수정주의”모자를 썼다. 그자들은  “정협은 요물잡귀신의 검은 굴”이라느니 “인대, 정협이 필요없다”느니 “정치가 어찌 협상할 수 있단말인가”했다.
정협전국위원회기관은 압력에 못이겨 1966년 8월부터 집무를 중지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각지의 정협조직역시 보편적으로 충격을 받아 활동을 정지했던 것이다. 
   
1968년 6월, 강생(康生), 사부치(謝富治) 등이 만들어 낸 <<제4기전국정협상무위원회정치정황보고에 관하여>>는 159명의 전국정협상무위원회회원중 74명이나 “반역자”, “반역자혐의”, “특무”, “특무혐의”, “국민당특무”, “반혁명수정주의분자”라고 무함, 중상하면서 적으로 몰앗던 것이다. 
  

2. 각 민주당, 공상련은 활동을 정지당했다.

1966년 8월 24일, 북경시중학의 홍위병들은 각 민주당파 중앙기관들에다 “최후통첩”을 내렸는데 지금부터 72시간내에 당장 일체조직들은 자동적으로 해산하라는 것이였다. 

25일, 각 민주당파 중앙기관은 저마끔 집무를 중지한다는 글을 내붙이였다. 민주당파의 각급 지방조직들도 핍박에 못이겨 활동을 중지했는데 각 민주당파, 공상련의 령도와 성원대부분이 비방중상과 모욕을 받았다. 통계에 의하면 북경에 있는 각 민주당파의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중 투쟁받고 가택수색을 당한것이 36. 5%에 달했다.      

3. 민족자산계급분자와 지식분자는 타격박해를 받았다
     
민족자산계급분자를 지주, 부농, 반혁명, 나뿐분자와 똑같이 여기고 타도했는데 허다한 사람들이 저금통장을 빼앗겼고 높은 봉급은 깎이였으며 사인의 집, 방을 무리하게 빼앗기우고 점령당했다. 어떤 기업에서는  행정직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억지로 차간에 내려가 체력로동을 했다. 자산계급가정출신의 자녀는 승학이나 취업, 참군, 승진 등 방면에서 기시를 받았다. 상해민주건국회, 공상업련합회의 통계에 의하면 상해시의 248명 시위위원중 조사받고 압수당한 사람이 236영이니 95%를 점하는 셈이다.    

<<5.16통지>>에서 제출한
“반당반사회주의적인 이른바 ‘학술권위’의 자산계급립장을 철저히 폭로비판하고 학술계, 교육계, 신문계, 문예계, 출판계의 자산계급사상을 철저히 비판하여 그네들이 문화령역에서 차지한 령도권을 빼앗아내야 한다”는 착오적인 리론과 정책의 지도로 하여 지식계는 “문화대혁명”의 중점재해구역으로 되었던 것이다.
구사회에서 건너온 많은 저명한 전문가, 학자, 교수들이 타도되였다. 심지어는 사상, 문화전선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둔 로혁명가와 당원마저도 반당반사회주의 “반동권위”로 몰리였다. 교과문위계(敎科文衛界)는 대부분의 지식분자가 박해를 받았다. 문화계의 저명한 인사, 이를테면 로사(老舍), 조수리(趙樹理), 주신방(周信芳), 맹규천(孟叫天), 반천수(潘天壽) 등은 박해를 받아 자진한것이다.
        

1971년 4월, 장춘교, 요문원이 만들어 낸 <<전국교육공작기요>>는 “문화대혁명”전 17년간의 교육사업이 거둔 거대한 성적을 부정하였을 뿐만아니라 해방후에 배양한 많은 지식분자마저 “자산계급지식분자”항렬에 집어넣고 압제하고 기시하면서 개조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4.당의 민족, 종교정책을 제맘대로 짓밟아놓았다.
 

그들은 또 종교문제에 관한 맑스주의 과학적인 론술을 외곡하면서 새중국이 성립된 이래 중국공산당이 종교공작에 대한 정확한 방침마저 부정하였고 종교신앙의 자유정책을 파괴하였다. 그들은 대량의 민족, 종교계인사들을 박해하였고 광대한 신도군중들을 핍박하여 종교생활을 못하게 정지시켰거니와 종교교직원들을 강박하여 환속하게 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불교의 사원과 도교(道敎)의 도관, 교당들이 문을 닫거나 혹은 파괴되였다. 5개의 전국성적인 종교조직과 그리고 일부의 어떤 종교사회단체와 지방조직들은 핍박에 못이겨 활동을 중지했다. 전국 10개소의 종교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 외에 당의 교무(僑務), 기의투성(起義投誠) 등 정책이 파괴되였다. 허다한 해외화교와 기의투항한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외국과 내통”, “변절자”, “력사반혁명” 등의 죄명을 뒤집어 쓰고 박해를 받았다.   
  
     통일전선 각 방면의 대표인물 대다수가   
당외지식분자였다               

민주당뿐이 아니다. 무당파인사의 대표인물은 거의다가 당외지식분자고 통일전선 기타방면의 골간력량과 대표인물역시 거의다가 당외지식분자들인 것이다. 
  
수선 당외지식분자는 각종 통일전선조직에서 골간력량인 것이다. 공상련(工商聯), 교련(僑聯), 대련(臺聯) 등 인민단체 그 자체가 당과 비당이 특정된 사회범위내에서의 련맹인 것이기에 다가 통일전선내에 드느것이다. 공상련(工商聯)은 공상계의 인사와 경제계의 지식분자로 이루어진 전국성적인 인민단체다. 교련(僑聯)은 조국에 돌아온 교포, 해외동포의 본국 거주가족과 화교의 전국성적인 인민단체다. 대련(臺聯)은 조국대륙에 거주하고있는 대만각족동포들의 애국민중단체다.  
   
이같은 전국성적이 인민단체는 다가 공산당령도하의 통일전선조직인것이다. 이런 통일전선의 대표인물 대다수가 지식분자로서 조직의 골간작용을 하면서 조직의 령도를 맡은것이다. 각급인민정협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가장 큰 통일전선조직으로서 그는 조직상 광범한 대표성과 정치상 거대한 포용성을 통일시키고 있다. 정협위원은 모두 각 당파, 각 인민단체와 각계별의 대표인사로서 대다수가 중, 고등지식분자다. 그런즉 정협이야말로 각류의 인재가 집중된 “인재고”이자 집중장소라 할 수 있다. 
      

개인숭배와 “신”을 모다들어 만들었다
  

리유한(李維漢.1896ㅡ1984)은 당초기부터 지도사업을 해온 로혁명가로서 장기간 당과 국가의 통일전선사업, 민족사업, 종교사업을 주관해오면서 리론과 실천에 탁월한 공헌을 한 것이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머리가 썩 맑아졌다.
    
1979년여름, 리유한은 북경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자기를 보러간 손기맹(孫起孟)과 말했다. 
   
“하나의 문제가 내 머리를 무겁게 하고있다. 글쎄 우리 당과 국가력사에 어쩌면 ‘문화대혁명’과 같은 끔찍한 동란이 다 생기는가말이다?”
    
리유한은 관건은 봉건유독이 숙청되지 않은데 있다고 했다. 
거듭사고한 끝에 리유한은 1980년 5월 24일에 등소평과 자기의 생각을 진술했다.    
“내가 정식으로 당신한테 건의하오. 당신이 봉건유독숙청에 대해서 한번 보충강의를 하는게 좋겠소.”
    
그는 계속말했다.
    
“개인숭배가 ‘문화대혁명’때 극히 엄중할 정도로 굉장히 발전했는데 그게 어떻게 생겨났는가 말이요? 모택동이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기실보면 모다들어서‘신’을 만들었단말이요.”
    
리유환은 구체적인 례를 한가지 들었다. 
  
“당신은 기억하는지.1962년도의 일이요. 한번은 인민대회당에서 회의를 했지. 올 사람은 다 왔는데 모택동이 안왔더구만. 그래 다들 기다렸지. 후에 모택동이 오니까 류소기부터 주은래 모두 일어선단란말이요. 그런데 당신만은 앉은채 까딱않더구만. 난 그때 저러면 안되는데, 례모가 없는거야했지. 따지고 보면 ‘신’을 만드는 운동이 기실은 그런데서부터 생긴것이고 내 이 머릿속에서부터 생긴거란말이요. 다른사람과 물어봐도 그렇게 말하고있소. 지금와 보면 딱 어느 한두 사람만의 문젠게 아니라 사회에 기초가있는거요. 당내외에 기초가 있단말이요. 내보게는 준의회의때부터 점점자라나 이지경에 이른것이요. 모택동은 뭐나 다 정확하다여기면서 무슨 문제나 그의 말 한마디에다 희망을 걸었으니까 이놈의 개인숭배가 간단치 않았지.... 한가지 건의할 건 내가 오늘 한 이 말이 모택동사상과학체계에서는 부족한 부분이니 당신이 보충해 넣어줬으면 하오.”
   
그해 8월에 등소평은 <<당과국가령도체재개혁>>이란 강화를 했다.
    
후에 호교목이 말했다.
“권력이 과분하게 개인한테 집중되는것은 당내에 봉건잔여의 영향이 존재하는 것과 관계된다. 당은 이 문제를 장기간 해결하지 않았다. 진독수시기에 해결하지 않았고 모택동시기에도 해결하지 않았다. 하여 결국은 엄중한 후과를 비져낸 것이니 이제는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는 리유한동지가 제출한 것이다. 등소평과 담화하면서 제출했는데 등소평은 그에 적극찬성했다. 이는 극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신이 절로 생겨나는게 아니다. 몇천년이 된다.“신”을 만드는 운동은 중국의 특색이였다. 우매한 그런 운동을 이제는 영 거더치워야 한다. 
         

          후르쇼브가 쓰딸린의 유체를 태운일이
                  모택동의 심리에 준 영향 
1956년 쏘공20차대회가 세계를 놀래웠다. 그번대회의 주요내용이 쓰딸린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대문을 열어졌혔기 때문이다. 쓰딸린은 1924년부터 레닌의 손에서 권력을 넘겨받아 1953년에 죽을 때 까지 30여년간 쏘련에서 일언이 중천금같이 말하면 말한대로 해온 인물이였다. 쓰딸린이 쏘련의 공업화속도를 가속화하고 독일파시스를 항격하여 승리를 거둔것은 그의 일생에 마멸할 수 없는 광채였고,  쓰딸린이 당내에서 잔혹한 투쟁을 벌려 육체를 소멸하고 개인숭배를 하게 하면서 민주화를 진압한 것 역시 씻지 못할 죄악이였다. 그는 살았을적에 당내에다 원한을 너무도 많이 쌓았다. 하건만 누구하나 감히 일어나 반항하지 못했다.    

모두가 부득불 량심을 속이면서 메스꺼울지경 가송했던 것이다. 하지만 쓰딸린이 일단 세상을 떠나니 그들은 그 존재를 인차 가맣게 잊어버리고말았다. 
       
쓰딸린이 죽은지 3년후에 쏘공은 20차당대회를 열고 쓰딸린을 비판하였을 뿐만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허다한 틀린안건 가짜안건 억울한 안건들을 죄다 활깍 뒤집어놓았다. 
       
1961년 쏘공22차대회에 이르러서 당내외는 쓰딸린시대의 잔혹한 투쟁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이미 극에 달했다. 흐루쇼브는 쏘공지도자로서, 쓰딸린을 비판하는 핵심인물이였다. 그는 이미 20차당대회때에 쓰딸린을 비판하는 <<비밀보고>>를 해서 세상을 놀래운데다 22차당대회에서는 또 온 사회주의진영이 눈만 크게 뜰 뿐 말못할 결의하나를 통과했던 것이다.
  
대회는 레닌묘에다 이오씨프 위싸리오노위츠 쓰딸린의 수정관을 계속보존해두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것은 쓰딸린이 레닌의 유훈을 위반하고 권력을 람용하여 진정한 쏘베트사람을 대규모적으로 진압하였거니와 개인숭배시기에 저지른 기타 행위를 보아도 그의 령구를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의 묘에다 두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쓰딸린의 유체를 인차 레닌묘에서 끄집어내다 태워버렸다. 

기실 쓰딸린의 유체를 화장한 것은 쏘공의 결정이였지 흐루쇼브개인의 의지가 아니였다. 쓰딸린은 생전에 제 무덤을 판 것이다.    
쏘공의 이런 거동은 중공령도인 모택동의 가장 큰 반감을 일으켰다. 그때로부터 흐루쇼브는 모택동의 눈에는 가시가 되어 제일 나쁜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일찍이 20차대회후부터 중쏘관계는 긴장해졌는데 심지어는 쏘련에서 전문가들을 전부철수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했던 것이다. 쏘련의 그같은 좌적인  로선은 설상가상으로 중국경제에다 막대한 곤난을 더해주었다. 
       
22차대회 후 중쏘량당은 전면론전을 벌리였다. 중공중앙이 발표한 <<九評>>은 모택동이 직접 필을 들고 쓴 것으로서 인심을 격동시키는 문자들은 직접 흐루쇼브를 향해 밑그루를 들추어 뒤번져놓았다. 그는 흐루쇼브가 쓰딸린이 살았을적에는 붉은광장에서 “쓰딸린은 나를 낳은 아버지와 같다”면서 가송하더니 쓰딸린이 죽으니 이제는 시체에다 채찍질한다고 까밝히였다. 그는 <<九評>>에서 몹시 분개하여 말했다.
 
“흐루쇼브가 쓰딸린의 시체를 태웠어도 흐루쇼브가 쓰딸린을 쏘련인민의 심목중에서 영원히 지워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모택동이 흐루쇼브를 겨누고 포격한 것은 쓰딸린을 잊지 못해 그러는게 아니였다. 모택동은 쓰딸린의 대국쇼비니즘(배타적 애국주의)에 대해서 일찍부터 염오를 느끼고 있었다. 중공이 간고한 투쟁에 말려들엇을 때 쓰딸린은 전력을 다해서 지지하지 않았거니와 심지어는 해방군이 장강까지만 내밀고 더 전진하지 말고 장강을 남북분계선으로 하라고가까지 했다. 모택동은 그가 통일된 강대한 중국을 무서워그러는것이라고 여겼다.
모택동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전국이 해방되여 몇 달이 지나서 모택동은 쏘련에 갔는데 생각밖에 쓰딸린은 역전으로 마중도 나오지 않았거니와 한차례의 담화도 진지하게 나누지 않았다. 하여 모택동은 몹시적막했고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흐루쇼브가 쓰딸린의 시체를 레닌묘에서 끄집어내여 태워버리리니 모택동은 시각을 바꾸어서 쓰딸린을 다시보게되였다. 어쨌든간에 쓰딸린은 30여년간이나 쏘련을 령도한 것이고 전당과 전국민의 애대와 찬미를 받은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한데도 죽었다해서 이제는 시체를 태워버리면서 까지 비판하고 채찍을 안기니 이건 량면파, 야심가의 짓이 아닌가?  반드시경각성을 높혀야겠다고 생각한것이다. 

때로부터 모택동은 “중국의 흐루쇼브”에 대해서 경각성을 각별히 높이기 시작한것이다. “문화대혁명”이 기실은 그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흐루쇼브식의 인물을 뽑아버리느라 일으킨 것이다.        
모택동이 친히 제정한 후계자 5항표준을 보면 표준마다에 흐루쇼브를 반면교재로 하여 “계승자”는 능히 대다수를 단결할 줄 아는 무산계급정치가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 특히는 흐루쇼브와 같은 야심가, 음모가에 대해 경각성을 높혀야 한다하고는 그같이 나쁜사람이 당과 국가의 각급령도를 찬탈하는것을 방지해야 한다면서 반드시 당의 민주집중제를 모범적으로 집행하는 자야지 흐루쇼브처럼 당의 민주집중제를 파괴하면서 전횡발호하고 제 동지를 돌연습격하면서 도리없이 개인독재를 부리는 사람이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때로부터 흐우쇼브는 “수정주의”대명사로 되었고 중국사람의 욕을 먹는 제일나쁜 외국사람으로 되여버렷던것이다. 

흐루쇼브식인물이 당내에 숨어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택동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발동하여 우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흐루쇼브”를 찾았고 드디여는 요문원(姚文元)과 이름이 가지런히 곡학아세하는 저질문인 척본우(戚本禹)가 <<청궁밀사>>를 비판하면서 맨처음으로 “중국의 흐루쇼브 류소기를 타도”하고 “우리신변에서 잠자고있는 흐루쇼브를 뽑아내자”는 구호가 나오게된덧이다. 그리하여 흐루쇼브는 그 몇 년사이 주파수가 가장높은 명사로 되었던 것이다. 

만약 쓰딸린을 추켜세웟던 흐루쇼브가 쓰딸린의 유체를 태우는 일이 없었더라면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내에 대규모적인 숙청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는가? 계급투쟁을 당의 강령에다 넣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는가?  아쉽게도 력사는 가설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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